untrodden land 딛지 않은 땅
Shinyoung Park
9 MAY - 5 JUNE 2025
박신영의 작업은 기억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회상이나 추억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가 다루는 기억은 경험의 단편이자, 감각적 흔적으로서 작동하는 이미지이며, 그 자체로 시간과 감정의 층위를 품고 있다. 이 기억은 하나의 이미지로 응결되기보다는, 서로 다른 시공간의 감각이 중첩되면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재구성되는 ‘풍경’으로 드러난다. 그의 회화는 풍경’이라는 개념을 장소적 의미로부터 분리하여, 감정과 기억이 얽힌 심리적 장면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번 개인전 《딛지 않은 땅》은 이러한 작가의 회화적 탐색을 보여주는 전시이다. 박신영은 “내가 보고 경험한 모든 시각적인 것들이 축적되어, 과거에서나 현재에서나 동일하게 재생되는 기억들이 있고 그것은 풍경이 된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풍경은 특정 장소의 재현이나 이상화된 자연의 이미지가 아니라, 기억의 방식으로 형성된 시각적 지형이다. 앞서 말한 듯이, 박신영의 풍경은 명확한 장소성이 부재한 채, 개인의 감정과 시간의 단위가 스며든 하나의 심리적 장소로 재탄생된 것이다.
작업의 방식 또한 이와 같은 회화적 사유를 반영한다. 박신영은 1980년대 미국 빈티지 만화책에서 가져온 이미지를 오려내고, 그것을 조합하여 콜라주한 뒤, 다시 캔버스 위에 유화로 그려낸다. 이 과정은 단순한 ‘재매체화’가 아니라, 시각적 기억이 변형되고 확장되는 방식을 담고 있는 구조이다. 원본 이미지의 맥락은 콜라주를 통해 해체되며, 다시 그려내는 행위는 그것을 작가의 감각 안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재현’이 아니라 ‘재구성’이다. 재구성의 회화는 기억 속 이미지의 불완전성과 불확실성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작가는 이렇게 콜라주의 조합, 회화로의 전개를 거쳐서 이미지에 대한 일종의 ‘제2의 시선’을 발생시킨다. 이는 보는 행위가 단순히 눈 앞에 있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감각과 결합된 심리적 작용임을 암시한다. 어떤 풍경을 볼 때 그것이 과연 지금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기억 속의 무엇이 겹쳐져 나타나는 것인지, 작가는 그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는 단일한 시공간을 지시하지 않으며, 현실과 상상,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느슨해진 상태에서 감각의 밀도를 획득하고자 하는 작가의 치밀한 계획인 것이다.
이번 전시 제목 《딛지 않은 땅》은 이러한 회화적 장소성에 대한 메타포로 읽을 수 있다. 이곳은 우리가 실제로 걸어본 적은 없지만, 감각과 기억 속에 이미 존재하는 곳이다. 그것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장소, 실재하지 않지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정서의 공간이다. ‘딛지 않은’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물리적 접근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가 도달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거리감을 함축한다. 이 거리감은 회화 속에서 오히려 감정의 밀도를 만들어내며, 우리는 그 속에서 스스로의 기억을 되짚고 감각을 복원하게 된다.
이렇듯 박신영의 회화는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기억의 과정’으로 기능한다. 화면 위에서 끊임없이 겹쳐지고 어긋나는 장면들, 익숙한 듯 낯선 인물들, 애매하게 인식되는 배경들은 관람자에게도 고유한 감정과 기억의 환기를 유도한다. 이 전시는 작가 개인의 내면을 그려낸 것이자, 동시대 시각 경험에 대한 보편적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다시 떠올리고 있는가? 《딛지 않은 땅》은 우리가 아직 발 딛지 않은 세계이자, 동시에 마음 속에 늘 존재해 온 장소다. 이 전시가 하나의 회화적 여정이자, 기억과 감정, 이미지의 층위들이 교차하는 시각적 실험이며, 무엇보다 관람자에게 회화가 여전히 사유의 장소로 기능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