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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rtain


Li Hyunwoo

 

12 JUNE - 11 JULY 2025





WORKS

이현우, 계단, 2025, Oil on canvas, 91 x 73cm

 

이현우, 네다섯, 2019, Oil on canvas, 91 x 65cm

이현우, 계단, 2025, Oil on canvas, 194 x 112cm

이현우, 지붕, 2025, Oil on canvas, 194 x 130cm

이현우, 파이프, 2025, Oil on canvas, 53 x 45cm

이현우, 오후 두시, 2025, Oil on canvas, 91 x 73cm

이현우, 지붕, 2025, Oil on canvas, 100 x 80cm

이현우, 레미콘, 2025, Oil on canvas, 53 x 45cm

이현우, 드라이브, 2025, Oil on canvas, 53 x 45cm

이현우, 드라이브, 2025, Oil on canvas, 22x 27.3cm

이현우, 벽, 2025, Oil on canvas, 22x 27.3cm

Curtain
Li Hyunwoo

12 JUNE - 11 JULY 2025

 




어떤 장면은 그 자체로는 특별하지 않다. 매일 오가는 길, 한낮의 그림자가 스쳐간 계단, 외벽에 무심하게 부착된 CCTV, 도심 가장자리의 방음벽, 금속성의 레미콘 트럭. 이현우는 그처럼 일상의 구석에 머물러 있는 풍경들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단순히 대상을 향하지 않는다. 그 위를 스치듯 흐르는 빛과 그림자, 그 변화의 결을 좇는다.


이현우의 회화는 사물의 전체를 담고 있지 않는다. 화면 속에 놓인 형상은 대체로 명확하지 않고, 선명한 서사를 갖지도 않는다. 어떤 대상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단순화되거나, 잘려 나가 있다. 대신 그 자리를 감싸는 것은 반복적으로 쌓아 올린 붓질, 연결된 색면, 화면의 질감 위에 남겨진 리듬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알아맞히게 하기 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기운과 빛의 온도에 먼저 반응하게 만들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담긴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의 회화는 다소 추상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차가운 구조의 추상이 아니다. 오히려 사물 곁에 천천히 머문 시선에서 비롯된, 조용하고 따뜻한 감각의 형식이다. 작가는 도시의 표면에서 하나의 장면을 떼어내고, 그 표면 위를 스치는 시간과 감정을 회화로 다시 짜낸다. 캔버스 위의 마른 붓질은 마치 천을 엮는 일처럼, 한 올 한 올 겹쳐가며 이뤄진다. 화면은 단단한 구조물이 아니라 감각의 결을 지닌 섬세한 직물처럼 완성되는 것이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물은 우리가 보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임으로써 존재한다.” (“Things are not what we see them to be, but they exist in and through their appearing.”) 이현우의 회화는 바로 그 ‘보임’의 방식에 주목한다고 할 수 있는데, 대상이 명확하게 드러나기보다, 빛에 스쳐 흐르고 그림자에 덮이며, 때로는 그 경계에서만 감지된다. 이는 사물의 실체보다, 환영이 드러나는 순간의 감각을 붙잡는 것이다.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레미콘도, 계단도 아닌, 그 위로 지나가는 오후의 한 시간대, 혹은 금속 표면에 맺힌 잠깐의 공기일지도 모른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커튼》은 그가 작업에 접근하는 방식 전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커튼은 사물을 가리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빛을 여과하고 공간의 분위기를 바꾸는 감각적인 필터이다. 작가 역시 대상 전체를 보여주기보다는, 그 위에 드리운 조용한 흐름—빛, 그림자, 감정의 여운—을 화면에 옮겼다. 그 간접적인 방식은 보는 이를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서게 만들고, 어딘가를 바라보다 멈춰선 순간처럼, 무언가를 기억할 듯 말 듯한 느낌처럼, 그의 화면은 구체적인 설명 없이도 감각의 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현우의 회화는 이렇게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대신 아주 사소한 순간을 고요히 들여다보고, 그 곁에 오래 머물게 한다. 그 정직하고 조심스러운 시선은 화면을 통해 천천히 드러난다. 그 결과 우리는 이현우의 회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어떤 감각을 ‘겪게’ 되는 것이다. 전시 《커튼》은 그렇게 펼쳐졌다. 빛이 머물다 간 자리, 그림자가 닿은 흔적, 그 경계에서 피어나는 감정의 결. 이 조용한 풍경들 앞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잠시 멈추고, 그 안의 리듬을 따라가 보길 바래 본다.






현현하는 풍경-그림, 회화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나의 전반적인 기질상 나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고,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는 걸 일찌감치 알았어요. 물론 그 길은 장애물이 많은 가시밭길이었어요, 찾는 것에서 발견하는 것까지의 길은 곧은길이 아니에요. 의지와 이성만으로는 그 길을 갈 수 없어요. 경청하고, 기다리고, 꿈꿀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예감에 열려있어야 해요. 1)

지붕과 지붕, 이곳과 저곳을 잇는 계단과 계단, 높은 벽에 설치된 CCTV, 더 높은 벽 위에 드리워진 전선, 운전하다 스치는 방음벽과 그 너머의 건물들, 옆 차선에 서 있던 레미콘, 그 모두에 드리워지는 빛, 그리고 빛에 따라붙는 그림자. 그림자조차 빛을 머금고 있어 청량하다. 바삭바삭한 공기가 채워진 볕이 따뜻한 날이었을까, 햇빛이 좋은 날이었을까. 정오를 지난 한낮일 터이다. 따끔하게 쨍한 햇살 아래의 세상이다. 작가가 스쳐간 하루하루의 풍경이다. 올려다보기도, 내려다보기도 한다.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한 전경들이 포착된다. 작가가 직접 마주한 풍경이다. 

이현우는 이미지들을 눈에 담고 사진으로 남겼다. 작업실에서 한 장씩 이미지를 넘겨 보다가 어떤 풍경들을 골라 화폭에 옮긴다. 눈에 맺혔던 그날을 화폭에 담기 위해 꼭 전체를 그릴 필요는 없다. 부분들만으로도 충분하다. 왜 그곳이었는지, 그곳의 한 부분이었는지 선택 기준은 분명히 있으나 매번 정확히 형언하거나 한정 짓기 어렵다. 설명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면 이유를 묻는 이에게 말끝을 흐릴 때도 있다. 말로 풀어낼 마음이었다면 애초에 붓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필연이었던 장면도 있다. 첫인상이 각인되어서일 수도 있고 잔상이 사라지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그냥 그리고 싶었다’가 그저 그냥이 아니란 것을 작가는 잘 알고 있다. 언제나 그럴 수는 없지만, 작가가 의식하든 안 하든 그가 세상을 보는 행위에는 예술적 의도가 담길 수밖에 없다. 작업을 잊고 있는 순간에도 자신이 보는 이미지에 예술적 해석과 변주를 하게 된다.

보고 그리기는 이현우가 세상을 대하는 주된 방법이다. 화가에게 이미지는 세상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중요한 통로이다. 이미지는 작가-우리를 향해, 우리에 대해 내밀하게 말한다. 이미지는 대상―존재하는 것― 다음으로 존재한다. 즉, “이미지는 대상의 연속이다.” 대상 다음이기에 멀어짐도 함께이다. 실재로부터 멀지 않기에 이미지를 통해 그것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 그러나 일정 거리를 유지하기에 물질적 속박을 벗어나게 한다. “반영은 그 대상의 이상적 표현, 실존에서 자유로워진 현전, 물질 없는 형태”이다. “이미지의 환영 가운데” 머무는 예술가는 “존재들을 이상화”하고 “물질에서 분리된 닮음으로 고양”시킨다. 그리고 이미지는 존재의 지울 수 없는 잔류물이 밀어내는 “무형의 무를 진정시키고 인간화시키는” 기능 중 하나를 만족시킨다. 이미지는 무를 씻어내고 조정해 “사랑스럽고 순수하게” 만든다. 그리고 “예술이 언제나 허락하는 행복한 꿈 한가운데”에서 현실과 섬세한 차이를 둔, 현실의 바로 뒤에서 “순수한 행복”이나 “놀라운 만족처럼” 현실적이지 않은 것의 “투명한 영원성을 발견한다고” 믿도록 만든다. 2)

이보다 고요한 풍경-회화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시각은 예민해진다. 모든 감각 경험은 눈에 집중된다. 사람들이 그려지지 않은 세계여서 더 조용하다. 어떤 작은 소리도 용납하지 않아 작품 앞에 선 감상자가 숨소리마저 가다듬게 하는 그림들은 시간이 멈춘 세상을 그린 것처럼 보인다.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찰나의 순간인지, 우리가 경험하는 물리적 시간을 초월한 영원인지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어느 쪽이든 오직 작가로 대표되는 시각의 주체만이 존재하는 이 시공간에 머물다 보면 평온한 고독이 뒤섞여 밀려온다. 고독은 부정적인 특성만 소유하지 않는다. 특히 예술가의 고독과 예술작품에 녹아든 고독은 단절로 이어지지 않는다. 낭만적인 환상에 자리한 외롭고 쓸쓸한 예술가상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창작의 모색을 위한 화가의 시간에는 잠시 혼자인 때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현우는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중요한 순간마다 홀로 시간을 보낸다. 특정한 풍경에 시선이 멈출 때는 마치 첫눈에 반한 것처럼 작가 자신과 눈에 맺힌 대상 둘만 존재하는 것 같다. 작업실에 돌아와 사진을 보며 기억-이미지를 복기한다. 풍경을 선택할 때부터 붓을 떼는 마지막 순간까지 작가는 오롯이 혼자다. 풍경 사진을 찍을 때, 그보다 앞서 풍경을 바라볼 때부터 회화적 몰입과 선택의 과정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회화 작품이라 착각할 정도의 구도와 색채를 보여주는 사진들은 가장 직관적인 증거이다. 작가의 안과 밖을 둘러싸는 건 온통 풍경-이미지뿐이다. 아른거리며 멈춘 장면들은 그렇게 눈, 머릿속, 카메라, 캔버스에 담겼다. 붓을 잡기 전, 선택한 사진을 확대하거나 특정 부분을 잘라내는 시간 또는 포토샵의 과정도 예외는 아닌데,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끝없는 이미지의 편집―수집, 정리, 구성, 재구성―에 집중하려면 당연한 일이다. 그림 속 형상과 색채의 목적지를 확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현우에게 편집은 지각과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고 그리는 과정 중에 일어날 수도 있다. 그것을 명쾌히 구분 짓는 건 무의미하며 불가능하다. 붓을 쥔 손을 움직이면서도 끝없는 결정의 순간들을 거친다. 포토샵을 사용할 때 “최소한”으로 “절제하기” 3) 를 고수하는 이유도 작품이 완성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서이다. 

한편 햇빛이 가득한 풍경화는 자연히-당연히 인상주의적인 무언가를 상상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한 미술 사조가 떠오른다는 단편이 아니라 인상주의 이후 회화에 서사의 사라짐, 입체감과 원근법의 약화 등이 나타났으며 그것이 조형 요소로 구성된, 물감이 얹어진 평면이라는 회화의 본질을 탐구하는 시작점이 되었다는 역사적 흐름이다. 바로 이 부분이 이현우가 야외 풍경을 그림으로써 실현하는 회화적 실험과 연결된다. 이현우의 회화는 풍경화로 끝나지 않는다. 작가는 회화의 본질 추구가 추상으로 이어진다는 공식-편견을 경계하지만, 풍경이 추상적 수수께끼처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풍경화가 재현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질 수 있을지 질문하고 상상한다.4)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재현과 추상 둘 다 붙잡는 그림으로 이어진다.


결과적으로 이현우는 재현이 단순 모방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쾌하게 증명한다. 설령 화가가 있는 그대로 그리려 최선을 다해도 오차 없는 복사는 불가능하다. 무미건조하게 그리려 해도 의식적, 무의식적 변형이 일어난다. 같은 대상을 그려도 시력과 같은 작가의 육체적 조건에서부터 심리적 상황, 물감이나 캔버스 천과 같은 재료의 특성, 기법의 습득 정도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재현이 충실한 기록이자 본대로 그린 것이라는 말은 처음부터 모순적이다. 같은 장면을 봐도 개인들의 눈에 맺힌 상은 너무나 다르다. 또한 눈에 맺힌 상이 전하는 정보는 너무 많고 다채로워 모두를 옮길 수 없다. 그렇다고 생략이나 단순화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실재보다 추가되고 꾸며질 수도 있다. 당연하게도 계단과 지붕을 그린 그림은 실재하는 계단, 지붕과 일치하지 않는다. 같은 하늘과 도로지만 같지 않다. 이런 이유로 작가가 그린 레미콘과 파이프를 본 뒤 실재하는 그것들을 새롭게 지각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작가는 한 작품-화폭에 담길 이미지, 재료, 표현법을 구성한다. 현실이든 상상이든 대상을 재현하고자 하는 화가는 보는 데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하지 않는다. 물감과 형태를 조작해 원하고 희망하는 형상을 짜맞추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결국 재현은 작가가 본 것을 온갖 방법으로 해석한 것이다. 5)
 

이현우는 지각한 세상에 미적 상상력을 더하고, 회화에 관한 생각들을 종합해 담는다. 그것이 예술가의 창작이다. 예술적 표현에는 항상 감각에 관련된 모든 경험이 거치는 사고, 이해, 판단의 과정이 압축된다. 상상이 더해지는 것 역시 당연하다. 미술은 당연히 “시각적 사고의 본거지”이지만, 미술을 오직 시각적 사고의 형태로만 대하는 것은 편파적이다. 미술은 “미, 완성. 조화 그리고 질서를 강조한다.” 이것은 “선택과 체제화의 문제를 제기한다.” 무언가를 회화로 보이게 하는 행위에는 대상의 근본적인 특성들을 파악하고 여기에 작가의 창작이―공상과 상상까지도― 결합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풍경의 일부에 집중하고, 색채를 변주하는 데에 때때로 막연한 상상이 큰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6)  

그런데 이현우의 회화는 상징으로 기능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레미콘>(2025)이나 <벽>(2025)처럼 풍경-대상의 부분들에 초점을 맞춰서 그런 것은 아니다. 대상을 알아볼 수 있는 정보가 충분히 등장하는 <파이프>(2025)나 <네다섯>(2019)도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작가의 내면이나 특별한 서사를 찾기 어려운 그림들이다.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걷고 운전하며 사진을 찍었는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햇빛 덕분에 온화한 정서가 전달될 뿐 감정의 고저장단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해사한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게만 된다. 그저 작가가 <벽>에서 연한 베이지 톤과 뽀얀 흰빛으로 칠해진 면의 비율을 어떻게 결정했는지, 왜 <드라이브>(2025)에서는 붓의 올 하나하나가 도드라지는 필치를 썼는지 궁금해진다. 특히 두 점의 <계단>(2025)과 또 다른 두 점의 <지붕>(2025)은 풍경화라기보다 오직 조형 요소에 집중한 회화를 위한 회화와 밀접해 보인다. 나열된 수평선 사이를 조심스레 채운 사각형들은 회화의 환영성뿐 아니라 평면성까지 나란히 붙잡는다.―사실, 작가가 만나는 현실의 소재들은 이미 그 자체로 추상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작가가 현실에서 찾아지는 조형성을 극대화해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 형상-이미지를 향하는 과정은 미려한 재현인 동시에 추상에 가까운 무언가가 된다. 독특한 분위기의 색조, 붓 터치의 강도와 속도, 직선과 곡선의 겹침, 형상들의 방향성, 그리고 언제나 빠지지 않는 빛과 그림자는 그 자체로 현현한다. 이제 예술작품은 예술가에 의해 비밀스럽고 신비스러운 수수께끼처럼 생겨난다. 그리고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한다. 7)

어쩌면 이현우는 그리는 사람이라는 자신의 위치가 빛남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매일매일 자기 앞의 세계를 본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것을 고이 눈에 담지 않는다. 기억을 하지도 못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지나칠 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화가가 선사하는 풍경들이 여기 있다. 풍경-이미지는 작가와 내밀한 관계를 맺고, 작가는 풍경-그림을 그리고, 그 결과물은 전시장에 걸려 또 하나의 풍경-이미지를 만든다. 보고 있을수록 마음이 기운다. 전시장 안과 밖에서 그 풍경을 다시금 바라보는 작가의 눈에는 무엇이 담길지 궁금해지는 고즈넉한 오후이다. 


1) 헤르만 헤세, 「자기 개성」, 『헤르만 헤세의 나로 존재하는 법』, 유영미(역), 뜨인돌출판(주), 2025, pp. 30-31.

 2)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이달승(역), ㈜그린비출판사, 2019, pp. 370-373.

 3) 이문정과 이현우, 작가 인터뷰, 2025년 6월 21일.

4) 앞의 인터뷰.

5) E. H. 곰브리치, 『예술과 환영: 회화적 재현의 심리학적 연구』, 차미례(역), 열화당, 2016, p. 56, p. 361, p. 363.

6) 루돌프 아른하임, 『시각적 사고』, 김정오(역),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22, p. 374.

7) 바실리 칸딘스키,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권영필(역), 열화당, 2000, p. 126

Curtain, 2025, installation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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