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노 유키
시작하는 첫 구절을 읽어 본다. 그것은 삶의 ‘단편(短篇/断片)’이다. 어려운 말도 아닌, 그렇다고 단조롭기만 하지 않은 시작이다. 보여지기 위해 쓰인 일기장과도 같이 에세이는 쓰인다. 머나먼 추억을, 오늘 경험한 일을 가까이 끌어 오기도 하고, 방금 지나간 장면을 충동적으로 담으려고 에세이는 쓰인다. 멀리 떠난 장면이나, 옆에 가까이 있던 것들이 글쓴이의 손을 따라, 그리고 독자의 눈을 따라 그려진다. 말과 더불어 보이는 것, 그와 더불어 내면이 흰 바탕에 상영된다—소리 없이. 우리가 종종 읽는 에세이란, 글쓴이가 그때 그곳에 보낸 시선을 다시 이곳으로 가져와 독자에게 다시 보내는/ 보낸 것이다. 글과 종이에 담는/담긴 것—그릇에 빗대어 말하는 정도로 견고한 틀이 필수적이지 않은, 순간적이고 솔직한 것이다. 에세이는 글쓴이와 독자가 주고받은 시선으로 빚어지고 시각적(인 동시에 비 시각적)인 이미지로 맺힌다.
개인전 《에세이》에 소개된 김민수의 회화를 보면 어떤 사람, 어떤 동물, 어떤 식물, 어떤 사물들, 어떤 장소가 보인다. 여기에 보이는 것은 작가와 함께 같은 공간에 있었거나 시간을 보낸 대상들이다. 붓 ‘터치’—이 접촉은 이전 작업에서 비교적 감각적이고 추상적인 흔적으로 남았다면, 최근 작업으로 오면서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로 나타난다1. 작가가 말하는 “피부에 직접 닿는 감각은 “삶을 더 깊이” 보는 시선을 거쳐 시각적으로 형태 잡힌 모습으로 화면에 들어온다. 그 중에서 어떤 것은 이름이 있고 이름이 없는 것도 있다. 에세이에 사사로움이 묻어 있다면, 소재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가까이 가져오려는 태도에 유래한다. 마찬가지로 김민수의 그림에서 버드나무, 새, 사람—이것들은 모두 작가의 시야에 들어오거나 마음이 다가가 그의 곁에서 넘실거리고 반짝이는 이미지들이다. 그 모습은 순간적으로 작가의 마음을 흔들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작가는 가까이, 비록 내 물건으로 소유할 순 없더라도 내가 다가갈 수 있도록 끌어온다. 곁에 있는 것들은 ‘어떤 것’—이름이 있는 특정한 것, 혹은 신분을 알 수 없는 것, 둘 다—이다. 사사로움은 모든 순간을, 아니 모두에게 순간적으로 닿는 몸짓이 되어 그림으로 들어온다.
소설이 어느 한 시공간으로 우리—독자와 글쓴이 모두—를 데리고 가는 글이라면, 에세이는 삶의 ‘단편’으로 우리를 맞닥뜨리게 하는 글이다. 흐르듯이 지나가는, 그 어느 순간을 고이 간직하는 것. ‘단편’—짧고, 어느 한 부분인 에세이는 책의 두께가 아닌 낱장, 전체가 아닌 일부에 머무는 짧은 호흡이다. 김민수가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그가 대상에게 시선을 보낸 순간보다 길다. 스치듯 떠오르거나, 눈 앞에서 본 것들은 한 순간인데 반해, 그림을 그리는 일은 보는 일보다 더 오래 걸린다. 그러나 그가 시선을 보낸 순간은 떠오르고 가라앉혔다 다시 떠오르기를 반복하면서 평면적 회화에 전달된다. 그때의 시간은 사실상 화면으로, 작업에 이어져 있다. 마치 내 시야나 마음 속에서 흔들린 잔물결이 퍼져 나가, 강 건너 내가 다시 기쁜 마음으로 받아 주는 것처럼, 그림으로 그때를 옮기는 시간은 지속의 형태를 띤다. 주변을 관찰하고 감각적으로 기록한 ‘터치’는 대상을 오래 바라보고 떠올리는 일을 통해 윤곽을 그려 나가 ‘삶의 깊이’로 데려다 준다.
에세이의 끝은 처음과도 같다. 그 가장자리는 곧 삶을 향하고 삶에 맞닿아 있다. 생생한 만남이 삶 속에 잠시 찬란하게 나타났던 그때, 그 순간을 여러 번 떠올리고 바라보면서 그림으로 옮기는 일. 회화에 담긴 물건, 사람, 장면은 작가의 시선에 머물렀고 지금도 머문다—화면에, 그리고 작가에게. 그의 곁에서 반짝거린 순간은 화면 안으로 들어와 보는 사람의 곁으로 오게 되었다. 작가의 삶에 맞닿아 있던 이미지, 그 이미지가 그려진 회화 작업은 작가의 시선이 닿았던 자리로 우리를 이끈다. ‘단편’이 말 그대로 짧고 부분적이더라도, 이는 곧 순간을 오래 간직하고 내 곁으로 끌어오려는 태도의 발현이다. 일생이 아닌 삶—생활 속 깊숙이 그러나 짧고 일부분인 그때, 그때가 지나도 계속 떠올린 낱장의 이미지, 이것이 화면에 들어온다. 그러면서 작가와 우리, 그림을 보는 사람과 가까이 지낸다.
1. 구체성은 그림의 형상은 물론, 스티커나 종이 콜라주, 로프처럼 물감과 다른 물성이 재료에 다뤄지는 점에도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