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mutation 전이
Byungho Lee, Chansong Kim, Choi Jiyoung
이병호, 김찬송, 최지영
1 October – 1 November 2026
몸이라는 말은 대개 인간의 신체를 가리키는 데 익숙하게 사용된다. 살과 피부, 뼈와 근육으로 이루어진 유기적인 구조로서의 몸. 그러나 몸을 하나의 물질적 존재가 가진 형상과 밀도, 표면과 부피로 확장해 본다면 그 범위는 달라진다. 돌에도, 책에도, 나무에도 몸이 있다. 그것들은 각기 다른 물질과 형태, 무게와 밀도를 가지며 하나의 존재로 우리 앞에 놓인다. 이때 몸은 생물학적 신체의 동의어라기 보다, 어떤 것이 하나의 물질적 실체로 존재하는 방식에 가까워진다. 그렇다면 작품에 있어서 몸은 어떠할까. 작품 역시 하나의 물질적 존재로 우리 앞에 놓인다. 그것은 무언가를 묘사하거나 특정한 형상을 취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물질과 형태, 표면과 부피, 무게와 밀도를 통해 하나의 실체로 다가온다. 우리가 작품을 바라볼 때 먼저 읽어내는 것은 그것의 이미지일 수 있지만, 그 이미지를 실제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그것을 이루고 있는 물질과 그 물질이 만들어내는 상태다. 그러나 물질을 따라가다 보면 다시 이미지가 드러나고, 이미지로 다가오던 것은 어느 순간 물질의 표면과 밀도로 감각되기도 한다. 이 전시에서 ‘몸’은 무엇을 닮았는가와 어떻게 존재하는가 사이에서 배회한다.
형상과 몸은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다. 지렁이 모양의 젤리를 떠올려 보자. 그것은 지렁이의 형상을 빌려왔지만 지렁이의 몸 그 자체는 아니다. 우리가 지렁이를 알아보게 하는 것은 그것의 이미지이고, 그것을 실제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젤리라는 물질이다. 형상은 무엇을 닮았는지를 말해주지만,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는가까지 결정하지는 않는다. 《Transmutation 전이》에 참여하는 세 작가는 모두 인체 형상을 주로 다룬다. 그러나 인체 자체를 작업의 몸으로 한정 짓지 않는다. 인체는 작업이 잠시 빌려오는 하나의 형상이며, 그 형상을 통해 각 작업은 자신이 가진 고유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PLA(수지)와 컬러석고, 물감과 캔버스, 흙은 인체의 형상을 담는 재료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들은 각 작업이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적 조건이며,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작업의 몸을 이룬다.
이병호의 작업에서는 인체를 알아보는 일이 훨씬 불확실해진다. 그의 조각은 한눈에 인간의 신체를 재현한 것으로 읽히기보다, 잘려지고 변형된 형상과 낯선 덩어리로 먼저 감각된다. 신체의 일부는 분리되고 변형되며, 익숙한 인체의 비례와 구조는 온전하게 유지되지 않는다. 그는 인체를 3차원 스캔을 통해 데이터로 포착하고, 이를 모델링하여 새로운 형상으로 구성한 뒤 3D 프린팅을 통해 PLA(수지)로 구현하고, 그 위에 컬러 석고를 얇게 덧입혀 색과 질감을 더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체가 얼마나 정확하게 재현되었는가가 아니다. 하나의 신체적 형상이 데이터와 모델링, 출력의 과정을 거치면서 어떤 상태로 달라지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이 작업의 실질적인 몸이 되는가이다. 신체는 데이터가 되고, 데이터는 다시 조형적 형상이 되며, 그 형상은 PLA(수지)와 컬러 석고라는 서로 다른 물질의 층을 통해 새로운 물질적 상태를 획득한다. 처음의 인체는 더 이상 온전한 신체로 남아 있지 않지만, PLA(수지)의 밀도와 컬러 석고의 표면과 질감, 그리고 굳어진 물질의 덩어리감은 오히려 더욱 분명해진다.
김찬송의 회화에서는 인체가 또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진다. 그는 인체 전체를 보여주기보다 신체의 일부를 확대하고 크롭하여 화면 안에 배치한다. 우리가 익숙하게 인식하는 신체의 전체적인 구조와 비례는 화면 밖으로 밀려나고, 한 부분의 형상만이 크게 확대된 채 남는다. 이번 전시에 선별한 작업들에서도 인체는 완결된 신체라기보다 화면 안에서 잘려진 하나의 형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화면을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인체의 형상보다 그것을 구성하는 물질이 앞에 놓인다. 물감은 형상을 채우는 수단에 머물지 않고 두께와 질량을 가진 물질로 쌓이고, 겹치고, 흐르고, 굳는다. 붓의 움직임은 형상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물감의 물성을 남긴다. 캔버스는 그 물질을 받아들이는 바탕이면서 회화의 물리적 몸을 함께 구성한다. 화면 위에 축적된 물감과 캔버스,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물질적 상태가 회화의 몸을 이룬다. 백합을 그린 작업 역시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여기에서 꽃은 인체와 다른 별도의 주제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형상으로 화면에 놓인다. 백합이라는 익숙한 이미지를 통해 드러나는 것 역시 결국 물감과 캔버스,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물질적 상태다. 인체와 꽃이라는 서로 다른 형상은 결국 하나의 질문 앞에 놓인다.
최지영의 테라코타 작업은 세 작가 가운데 가장 전통적인 조각의 언어에 가까이 놓여 있다. 인간의 몸을 비교적 온전한 형상으로 빚어내고, 흙을 만지고 다듬는 과정을 통해 인체의 구조와 비례, 자세를 조각의 언어로 옮긴다. 그의 작업에서 인체는 비교적 명확하게 인식되는 형태로 우리 앞에 놓인다. 얼굴과 신체의 구조, 자세와 균형은 인간의 몸을 떠올리게 하는 조각의 오래된 문법을 따른다. 그러나 그 익숙한 형상 역시 흙이라는 물질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흙의 입자와 무게, 표면의 질감, 손으로 빚고 다듬은 흔적, 소성을 거쳐 굳어진 상태는 인체의 형상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테라코타는 인체를 재현하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동시에 그 형상을 실제로 존재하게 하는 몸이다.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인체를 세워놓는 작업에서도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인간의 신체만이 아니다. 인체의 형상을 빌려온 조각은 흙이라는 물질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몸을 드러낸다.
세 작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체의 형상을 다룬다. 이병호에게서는 분절되고 변형된 형상이, 김찬송에게서는 확대되고 크롭된 신체의 일부가, 최지영에게서는 전통적인 조각의 언어로 세워진 인체가 나타난다. 형상이 인체로 명확하게 인식되는 경우도 있고, 익숙한 신체의 모습에서 멀어진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체의 형상만으로 작업의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다. 형상은 작업이 무엇을 닮았는지를 알려주지만, 작업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는 각각의 물질이 말해준다. 형상을 따라가다 보면 그것을 이루고 있는 물질이 드러나고, 물질을 바라보다 보면 다시 그 안에서 하나의 몸과 이미지를 알아보게 된다.
전시《Transmutation 전이》에서 말하는 ‘전이’는 하나의 형상이 다른 재료로 단순히 옮겨가는 것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인체의 이미지를 빌려온 작업이 서로 다른 물질적 조건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그 과정에서 이미지와 물질 사이를 오가며 다른 상태로 감각되는 변화에 가깝다. PLA(수지)와 컬러석고, 물감과 캔버스, 흙은 인체의 형상을 담으면서 동시에 그 형상을 물질의 표면과 밀도, 무게와 질감으로 다르게 감각하게 한다. 이미지와 물질은 서로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작업 안에서 겹쳐지고, 때로는 서로의 자리를 바꾼다.
결국 이 전시에서 바라보는 것은 인간의 신체만도, 작업의 물질만도 아니다. 인간의 형상을 잠시 빌려온 각각의 작업이 어떻게 존재하며, 어떤 고유한 몸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우리가 처음 사람의 몸이라고 알아본 형상 뒤에는 PLA(수지)와 컬러석고의 몸, 물감과 캔버스의 몸, 흙의 몸이 있다. 형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 형상을 이루고 있는 물질이 드러나고, 익숙했던 몸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감각된다. 《Transmutation 전이》는 형상과 물질을 바라보며, 각각의 작업을 통해 몸이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지를 질문한다.